사람들과의 관계, 깊이는 함께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만남의 횟수에 연연했고, 지나치다 할 정도로 만나는 일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사람들을 통해서 얻는 행복감이 큰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관계를 대하는 마음도 한결같을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르고 환경이 변화하다 보면 관계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만남의 횟수는 줄어들고, 관계도 단조로워졌다. 다양한 색깔로 두텁게 쌓아왔던 관계의 층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의도했던 바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겹겹이 싸여있던 관계에서 한 겹, 두 겹 벗어나는 과정이 낯설기도 했다. 외로움과 쓸쓸함. 이 낯선 감정에 대한 앞선 걱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적도 있었다. 나름의 대비였다. 그러나 예상하는 것과 체감하는 것은 달랐다. 외로움의 한 가운데에 ‘턱’ 놓이게 되었을 때 나름의 대비는 무색해져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관계를 맺기 위해 문을 나서지는 않았다.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여러 개의 터널을 통과해야 하듯이, 터널처럼 느껴지기도 했던 긴 시간은 혼자서 건너야 할 몫이었다. 덤덤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것마저도 쉽지 않을 땐 알아차림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사람들을 찾는 대신 선택한 방법이었다.

이제는 낯설었던 감정에도 꽤 무뎌진 것 같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 시간이 남긴 선물은 존재에 대한 감사함이었다.

바람결에 모래가 흩날리듯 가벼웠던 인연은 자연스럽게 떠나갔다. 그러나 만남의 횟수와 시간에 연연해하지 않고 늘 한결같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의 짧은 만남 한 번으로도 안도하게 하는 사람들. 비록 예전처럼 마주하지 않더라도 분명 힘이 되어주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단단한 무언가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을 보란 듯이 느끼게 해주었다.

나의 가족들. 많은 가족의 수만큼 사건 사고가 잦았던 어렸을 땐 가족들에게 애정도, 미움도 없었다. 가족이라고는 하지만 ‘관심’이라는 테두리 밖에 그들을 두었던 것 같기도 하다. 밖에서는 표현도 많고, 살가운 성격인 것과는 달리 집에서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막내딸, 막냇동생이었다. 대다수가 그렇듯, 가족 중 누군가를 먼저 떠나보내는 시간을 겪으면서 가족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가장 큰 아픔을 함께 공유하며 함께 이겨내기 위해서 만난 사람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에 대한 애틋함은 점점 더 자라날 것 같다.

가장 가까이에서 공부를 도와주는 분들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한 존재들이다. 불교 공부는 스승과 도반이 전부라는 말에 절절히 공감한다. 공부 인연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늘 때맞춰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까. 희유하다는 표현 밖에는 달리 덧붙일 말이 없다. 살면서 겪는 일을 미주알고주알 모두 전하더라도 그들은 내게 마음이 가야 할 길을 성심을 다해 알려주었다. 가야 할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해 주었다. 지금은 예전만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헤매고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해답들을 살펴보면, 이미 그들의 가르침이 내 안 깊숙한 곳에서 단단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중국의 한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작품들은 그를 어느 정도 이끌어준 다음 스스로 하여금 혼자 걸어가게 했다고. 그들이 한평생 일궈온 가르침은 내게도 지표가 되어 혼자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고 있다.

그리고 친구와 도반들. 마음이 딱 들어맞는 그들과 함께하다 보면 우리는 대체 어떤 이유로 만나게 된 것인지 궁금하게 여겨질 때가 있었다. 한 가지로 요약해 보자면 마음결이 같기 때문이 아닐는지. 함께 하는 시간이 ‘한때’로 그칠지, 평생으로 남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과 나눈 마음결은 더 깊이 아름다운 무늬를 만들어낼 것 같다. 모진 풍파를 이겨낸 고목에 아름다운 나이테가 남겨지듯이. 지난한 삶의 여정에서도 이들과 나눈 마음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다시는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아니 그 누구도 의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의지하지 않고서는 단단히 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나’는 ‘나’가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데 어찌 홀로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의지하는 마음이 나쁜 건 아니다. 밑바탕에 집착이 엉겨 붙어있는지, 자연스러움이 흐르고 있는지에 따라 달리 드러날 뿐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기도 하다고. 그러니 네가 행복한 게 곧 불사佛事이기도 하다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혼자가 아님을 상기해 준 따뜻한 메시지였다.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건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를 연결하고 있는 그 무엇 때문이 아닐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는 말을 기록해 본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 될 테니 나와 인연 있는 모두가 행복하기를, 평안하기를 기도하며 9월의 첫날, 가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