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5일. 라니에세이 첫 번째 연재글을 시작으로 오늘 12월 15일 마지막 연재글을 보냅니다. 이번 글은 1년간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면서 글쓰기와의 인연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흘러왔는지 담아봤습니다. 오랜만의 조금 긴 글,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함께하시는 건 어떨까요.^^

봄, 개나리, 생일, 남동생.

글짓기 시간, 처음 칭찬을 받았던 글의 소재이자 키워드이다. 한 줄 줄거리로 요약하자면 ‘봄, 내 생일에 한 살 터울 남동생에게서 선물로 개나리 꽃다발을 받았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오글오글, 조금 많이 부끄러운 건 내 몫인 건가(독자님들 몫이기도 할까요?^^). 하지만 글에서 묻어났던 따뜻함과 밝음이 떠올라 열 한 살 아이의 감성을 오랫동안 지켜주고 싶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글을 아주 잘 썼다며 칭찬을 해주셨고, 덕분에 나는 정말 글짓기에 소질이 있는 아이인 줄 알았다. 글짓기에 흥미를 느꼈고, 초등학교, 중학교 때까지는 각종 산문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도 했다. 선생님의 칭찬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글쓰기와 친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특출하게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를 특별하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릴 적 장래희망 칸을 채운 건 글쓰기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가령 기자나 혹은 라디오 작가와 같은 것. 언젠가는 꼭 책을 써야겠다는 다짐도 했었는데, 작가가 꿈이었다기보다는 목돈을 벌 목적 때문이었다. 책 판 돈으로 꼭 아빠의 틀니를 해드리고 싶었다(책을 출판하면 돈을 많이 벌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순수했다, 정말로.).

대학 시절에는 글쓰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기껏해야 가끔씩 손편지를 쓰는 정도. 아, 스무 살 새내기 때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유서 쓰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쓴 유서를 낭독할 때 함께 있던 친구들이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본격적인 글쓰기 인생은 대학 졸업 후 첫 사회생활부터였다. 대학 선배들이 창간한 아주 작은 청년 시사잡지사에서 일을 하게 된 것. 글 쓰는 방법을 따로 배운 건 아니지만 ‘같이 한번 일해보자’라는 선배의 말에 망설임 없이 첫 직장으로 출근했다.

나름 ‘기자’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잡지는 격주로 출간을 해서 전국의 대학교에 무료로 배포했다. 잡지의 기획과 컨셉을 잡고, 소재를 찾고, 취재를 하고, 글을 쓰고, 편집을 하고, 관련된 이미지 자료를 찾고, 밤새 마감을 한 후에 출판사에 가서 최종 디자인을 확인 후 인쇄소에 넘기기. 참 숨 가쁜 2주일이었다.

기획 회의 때는 감을 잡지 못해서 헤매기 일쑤였다. 나름대로 퇴고를 거친 글을 편집장 선배에게 보내면 빨간 줄, 빨간 글자 그득그득한 종이만 되돌아왔다. 출근길은 더 곤욕이었다. 양주역에서 1호선 지옥철을 타고 자리를 잡으면 사무실이 있던 홍대역까지 노트북과 씨름이 이어졌다. 마감 일자를 맞춰야 했기에 장소 불문하고 원고를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감 기간은 지옥이 따로 없었다.

글쓰기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으니 실력이 얼마나 형편없었을까. 그렇게 깨지고 혼나면서 패배감에 젖었다가도 취재원을 만나면 생기가 솟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삶을 글로 담아내는 시간이 좋았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늘 나를 비추어봤다. 존경할 만한 분, 배울 점이 많은 분들과의 대화는 나를 살아있게 했다.

첫 직장에서 4년간 일을 하며 수 십 권의 잡지를 발간했다. 프로젝트를 하면서 2권의 책에 공동집필자로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작은 규모의 잡지사에서 시작한 소소한 글쓰기였지만 글쓰기의 기본을 배운 시기였던 것 같다.

새로 옮겨간 직장에서는 글쓰기와 무관한 일을 했다. 그러나 기획서와 평가서 작성 업무에 큰 부담을 갖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그동안의 글쓰기 경험이 허투루 흘러간 건 아닌가 보다.

다시 글을 본격적으로 쓰게 된 건 SNS에 올린 ‘rany_essay’ 덕분이다. 어느 스님의 에세이를 읽고서,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 소중하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을 닮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시콜콜한 사생활로 피드를 채웠다. 쓰다 보니 글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SNS는 사진과 짧은 글만 올리는 공간이라며 지인들의 핀잔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꿋꿋하게(!) A4 용지 1장 분량의 글을 냅다 올렸다. 점점 피드는 마음을 돌아보는 글, 관계에서 느껴지는 감사함에 대한 글로 채워졌다. 많이 무기력했고 위축되었던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시간이었다.

SNS의 글로 나를 접하는 사람들은 댓글과 DM으로 응원과 격려, 공감의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중에는 소수이지만 내 삶에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인연들을 만나기도 했다. 글이 가진 힘, 그것으로 내가 변하고 관계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가끔씩 매체에 기고글을 쓰기도 하고,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잘 쓰는 건 아니다. 문장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메시지가 특별하지도 않다. 하지만 글쓰기는 내가 죽을 때까지, 평생동안 하고 싶은 일이 되어 버렸다. 나에게 글을 쓴다는 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이자 나를 받아들이고 관계를 달리 보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따뜻함을 채운 글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마음, 성찰, 성장, 자연, 사람.

이건 요즘 내가 쓰는 글의 주요 키워드이자 소재다.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며 마음을 살피는 일, 하늘과 바람과 나무를 느끼며 지금 내 앞에 놓인 순간순간들에 감사해하는 일, 무엇보다 나를 지탱해주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보듬어 보는 일. 글 쓰는 시간이 모여 나는 더 오롯해졌다.

40년, 50년이 지난 후 나의 글쓰기 역사는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궁금함과 설레임에 몽글몽글해지는 밤이다. 🌵

님,

오늘 글을 마지막으로 2023년의 라니에세이는 마감합니다.^^ 여러분들과의 나눔으로 저를 비춰보고 저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잠시 휴식기를 갖다가 내년에도 라니에세이는 이어갑니다. 새로운 주제와 방식으로, 읽기에도 편하고 여러분들에게 좀 더 남김이 될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보려고요.

2024년 2월 부터 시직할게요. 리뉴얼해서 선보일 '2024 라니에세이'를 구독자하실 분들은 '구독 이어가기'를 신청해 주세요. 🔔 

매일매일이 좀 더 평안하시길, 늘 마음을 살피며 더 행복하시길,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